10여년 전 학생 때 실기 학원을 다닐 때였다.
내가 봐야 하는 시험은 모델을 중앙에 세워두고 4~5시간 동안 흙으로 두상을 제작하는 거였다.
수능 전에는 보통 주 5회 2~3명 정도의 두상을 제작했다면,
수능이 끝나고 특강이 시작되면 하루에 1명 혹은 3명까지도 제작했다.
초반에는 디테일 작업까지 포함해서 8시간~ 10시간 정도를 한 모델의 두상만을 제작했다.
이 때에는 집에 가는 길에 그 모델의 이목구비의 간격이 머릿속에 다 그려졌다.
기억만으로 스케치해도 얼추 비슷하게 얼굴의 형태를 잡을 수 있었다.
그만큼 작업시간 동안 모델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거다.
내 얼굴에 새로 난 뾰루지는 몰라도, 모델의 얼굴 구석구석에 있는 점과 솜털까지 파악했다.
그리고 다음 날 새로운 모델을 만나게 되면 전 날 꿈 속에서도 나올만큼 관찰했던 모델에 대한 기억은 날려버리고 새로운 모델을 맞이한다.
이런식으로 공부를 하다보니 생기는 버릇이 있었다.
지하철, 버스 등을 이용하거나 누군가와 마주보고 대화할 때 상대방의 얼굴을 관찰하게 되었다.
못생겼군~ 잘생겼군~ 하고 평가하는게 아니다.
나도 모르게 정수리부터 턱 끝까지의 길이를 파악하고, 삼등분 한 후 상중하안부의 길이를 자동으로 훑어낸다.
그리고 아차 하고는 혹시나 상대방이 부담스러워 할까봐 시선을 돌리곤했다.
이 실기시험은 비교적 특징이 강한 사람을 모델로 두고 만들어내는 데에 유리했다.
그만큼 닮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.
해서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오거나, 무난한 인상의 사람 혹은 미남미녀는 비교적 특징을 뽑아내는데에 어려웠다.
(닮게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)
그렇게 1년 반 정도를 공부하며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얼굴을 만들다보니 느낀 점이 있었다.
누구나 얼굴에 이쁜 구석이 있다는 거다.
처음 모델을 맞이하면 모두 모델에게 인사하며 모델 두상의 큰 특징을 파악한다.
이 때, 얼굴에서 오는 느낌도 파악하는데 무난한 인상 혹은 눈에 띄지 않는 인상일 경우 별 생각없이 제작에 들어갔다.
그렇게 2시간 정도가 지나면 모델의 이목구비 및 두상 디테일을 잡아야 하는 시간이 온다.
보통 내게 정면이 주어지는 시간은 넉넉하면 20분 정도였다.
20분동안 나는 처음보는 사람과 (모델) 1:1로 마주보고 있는 거다. (모델도 참...힘들었을거다....)
그러다보면..... 모델에게 빠져든다......
어... 이사람 옅게 쌍꺼풀이 있었구나.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뻗어나가고.....
눈 두덩이가 일반적이지 않네. 이런 구조는 오랜만인데....매력있네....
관골이 생각보다 다르게 뻗어서 입체적으로 보이네.
턱뼈가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살이 동그랗게 올라있어 더 턱이 길어보이네.... 등등....
그리고 작업시간이 끝나 모델의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나고 다시 보면, 처음과는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.
이 사람 생각보다... 평범하게 생긴게 아닌데? 하고 느끼는 시간이 많아진거다.
얼추 바라보며 큰 이목구비에 화려한 생김새로 눈을 사로잡는 사람들만을 파악했다면,
이제는 사람마다의 작은 디테일과 구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었달까.
누구나 숨어있는 이쁜 구석이 있구나.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라는 말이 또 여기서 이렇게 맞네 하고 생각했다.
또 있다. 웃는 사람은 대체로 다 예쁘다는 거다.
4~5시간동안 모델은 무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는다.
작업자(학생)들은 무표정인 모델을 그 시간동안 관찰한다.
그러다가 시간이 끝나면 대체로 모델들은 한숨을 크게 쉬어내며 수고하셨습니다. 하고 말하고 환하게 웃는다.
처음에는 시간이 부족한 초급자라 일어나는 모델들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웃지 말라고 속으로 소리쳤다.
(1초라도 더 보고 만들어야하기 때문)
하지만 나중에 실력이 늘고 여유가 생기자 그때서야 모델들의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.
아 .예쁘다.
여기서 예쁘다는 건 그사람의 외모가 이쁘다 못생겼다를 말하는 게 아니다.
어떤 모델이건 무표정보다 미소지은 얼굴이 좋다고 느껴졌다.
눈이 작아지고 근육이 당겨지는 그 밝음에서 오는 분위기를 무시할 수 가 없다고 느낀거다.
아무리 잘 만든 두상도 실제 사람의 얼굴을 따라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.
그 생동감과 근육의 느낌. 미소지을 때 얇게 말려올라가는 입근육 .그리고 특히 눈빛.
혹은 서로 한껏 긴장을 풀고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말하며 서로에게 미소짓는 그 순간이 좋았던 걸 수도 있다.
5~8시간동안 마주보며 생긴 정...(?)과 아쉬움을 뒤로 한 채, 모델을 떠나보내며 함께 인사하던 그 시간이.
그 후 대학교 입학 하고, 입시 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.
이때 나의 별명은 칭찬봇이었다.
학생들은 내게 매일 선생님은 칭찬만 해준다고 하지만, 나는 정말 그 학생들의 장점을 보았다.
외모에서가 아니라 학생의 성격, 습관, 재능 등 남들이 보지못하는 장점을 잘 찾아 칭찬해주었다.
억지로 찾아낸 게 아니라 실제로 너무 기특하고 예쁜 부분들이었기에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.
전에는 이런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다.
내 외모에 자신감도 없었는데.(그렇다고 지금 자신감 뿜뿜이라는건 아니다),
얼굴의 미운점보다 괜찮은 부분들을 더 생각하게 되었고, 그게 왠지 모르게 귀엽고 소중해졌다.
또 나는 남의 단점을 잘 찾아내고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는데, 어느 순간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관찰하는게 참 즐거워졌다. 그 사람의 이쁜 구석을 찾아내는 게 흥미로워졌다.
지금도 나는 낯을 가리고, 사람도 가리지만.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건 즐겁다.
정말 불 지옥 같았던 입시공부가 내게 도움이 된 이쁜 구석이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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